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종교 개혁 (문단 편집) === 가톨릭의 대항 === >이 시점에서[* 발췌자 주석: 위에서 인용한 1560년에서] 60년 후로 넘어가면 상황이 사뭇 달라 보일 것이다. [[프랑스]]에서 [[위그노]]들은 패배하여 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네덜란드]] 남부는 구교에 의해 수복되어 재차 가톨릭화되었다. 독일 남부 대부분은 가톨릭의 수중에 있었고, 활기찬 가톨릭 부흥이 [[오스트리아]], [[폴란드]], [[헝가리]]를 휩쓸고 있었다. 신교는 막다른 골목에 몰렸고, 그것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냉소적인 답변으로 제시할 후보가 있긴 하다. 바로 군사력이다. (중략) 그러나 무력이 전부였던 것은 결코 아니다. 가톨릭교는 자체 종교개혁을 추진하는 가운데 유서 깊은 위력에 의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것의 충격에 자신을 노출하기도 하면서 스스로를 뜯어고쳤다. 그 과정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중략) [[트리엔트 공의회]]의 제1차 회기(1545~1547)에는 주로 가톨릭의 견해와 신교의 견해를 분명하게 구별하는 식으로 가톨릭 교리(예컨대 성서와 전승의 상보적 위상에 관한 교리)의 정의를 공식화했다. 제2기(1551~1552)와 제3기(1562~1563)에는 제도를 개혁하는 문제와 씨름하여, 주교들에게 한가한 귀족이나 정부 관료처럼 유유자적 돌아다니지 말고 신자들의 목자로서 각자의 교구에 상주하라고 명령하는 교령을 도출했다. 가장 중요한 개혁은 모든 교구에 성직자 양성―중세에는 명백히 마구잡이 과정이었다―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라는 교령이었을 것이다. 규율에 충실을 기하는 교육받은 [[사제(성직자)|사제]]를 길러내려는 열망은 가톨릭 개혁의 주춧돌이었다 > >[[트리엔트 공의회]]는 가톨릭 교도로 존재하는 새로운 방식을 개시했다. [[라틴어]]화된 형용사 '트리엔트식(Tridentine)'은 그 방식을 나타낸다. 공의회가 마무리될 무렵, 아직 갈 길이 멀기는 했지만 가톨릭 개혁은 부인할 수 없는 성과를 거둔 터였다. 우선 논란이 분분한 거의 모든 쟁점에 관한 가톨릭 교리를 명료하게 밝힘으로써 단일한 로마의 정치적 가톨릭교회―종교개혁 이전 유럽에서 공존했던 더 엉성한 표현인 '가톨릭교들(Catholicisms)'을 대체했다―의 통일된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평신도를 위한 표준화된 교리문답서(종교 교육서)를 공인했고, [[미사]] 집전의 균일한 순서를 정했다 ― 트리엔트식 전례는 지금도 가톨릭 전통주의자들의 사랑을 받는다. 공의회는 '악폐'를 척결하고자 사제와 [[주교]]가 교회의 사목에 정력을 쏟게 했다. 그리고 15세기 공의회들과는 반대로 교황직의 권한을 약화하지 않고 오히려 강화했다. 연이은 교황들은 [[트리엔트 공의회]]의 진행을 면밀히 감시했고, [[비오 4세]](1559~1565)는 교령을 승인하면서 그것을 해석할 권한을 자신에게 남겨두었다. 트리엔트 이후 교황의 권위는 제도적으로만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강화되었다. 보르자 가문의 불명예스러운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예증하는 르네상스기 로마의 퇴폐적인 분위기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16세기 후반 [[비오 5세]](1566~1572), [[그레고리오 13세]](1572~1585), [[식스토 5세]](1585~1590) 같은 후계자들은 높은 수준의 금욕생활로 교황직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 >(중략) > >트리엔트식 성성들 중 하나는 (1622년 설립된) 포교(Propaganda fide) 성성이었다. 여기에 쓰인 프로파간다(Propaganda)가 현대에 정치적 기만과 조작을 뜻하는 용어로 쓰였다는 사실은 어원에 때때로 문화적 편견이 파고든다는 것을 보여 준다. 포교 성성은 로마 교회가 더이상 유럽에만 국한된 교회가 아님을 깨달은 [[교황청]]이 뒤늦게 공인한 기구였다. [[포르투갈]] 무역상들과 [[에스파냐]] 정복자들에 뒤이어(때로는 그들에 앞서) 가톨릭교는 세계 종교, [[남극]] 대륙과 아직 유럽인이 발견하기 전이었던 [[오스트레일리아]]를 뺀 모든 대륙에 신봉자를 둔, 진정으로 지구를 아우르는 최초의 신앙이 되었다. >---- >Peter Marshall,「종교개혁」 한편 가톨릭은 개신교에 맞서려고 쇄신운동을 시작했다. '가톨릭의 종교개혁' 또는 '대항종교개혁'이라고도 한다. 영어로는 counter-reformation 이라고 표현하는데, 개혁에 대한한다는 뜻이다. 한국에서는 과거 그 의미를 적절하게 표현하는 번역이 없어 반종교개혁, 반동종교개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나 원래 의미를 온전히 전달하지 못하고 가톨릭을 폄하하는 번역이라는 주장으로 인해 위의 용어로 대체되어가고 있다. [[예수회]]의 등장과 [[트리엔트 공의회]] 등으로 대표된다. 가톨릭교회의 주요 교리와 윤리를 간단하고 명료하게 담고 있는 교리문답서가 발간되었고, [[성직자]]와 [[수도자]]가 사용할 새로운 [[성무일도]]서가 개정되었으며, 세계 모든 서방 가톨릭교회가 로마 전례로 통일하여 사용하게 될 개정판 미사경본이 간행되어 [[트리엔트 미사]]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불가타 라틴어 성경의 개정판이 발간되었으며, 지역교회의 주교들은 임지에 상주하는 의무를 다하면서 주일과 축일에는 강론을 하고 본당을 방문하는 사목활동에 충실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사제]]양성을 위하여 모든 교구에 신학교를 세우라고 선언했는데, 중세기에는 사제 교육이 현대인들에게 마구잡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였지만, 신학교는 이런 현상을 해결해줬으며 주교들은 신학교육과 영성지도를 받은 사제 지망자를 전보다 더욱 엄격하게 심사하여 사제로 [[성품성사|서품]]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서 기존에는 기사와 귀족들에 가까웠던 봉건적 성직자들이, 장교와 관료들에 가까운 근대적 성직자들로 변화하게 되었으며, 전체 가톨릭교회가 체계화되고 일원화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다만 신학교 시스템에는 기존 지역사회의 기득권층이 교황청의 과도한 폭정이라며 아우성을 치기도 하였다. 또한 가톨릭 종교개혁의 일환으로 도입된 새로운 영성운동은 바로크 예술과 결합되어 가톨릭교회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가톨릭 내에서 이들의 개혁이란 그저 단순한 대항 수준이 아니라, 중세 내내 되풀이된 쇄신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개신교계에서는 결과적으로 당시의 사회상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도 못했고, 내부의 부패를 완전히 뿌리뽑지도 못했고, 단지 일부 제후들을 다시 가톨릭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을 뿐이라는 평가를 내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